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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28

5/4

온 몸이 젖을 듯 안개 낀 아침을 걸었다.

IFS#3 작업 시작.

세상은 미묘한 랜덤 제네레이터이다. copy and paste는 세상에 원래 없는 것이다.

보현, 아내와 한라 동물병원 선생님을 뵙고 왔다.

한 마디에 노트 둘 혹은 하나. 12분 가량 손으로 하나하나. 나는 반복 없는 루프를 원한다.

5/5

축축한 입하의 아침.

운동장 트랙에 수많은 달팽이들이 다들 부지런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간혹 서로 꼭 붙어 있는 달팽이들도 보였다. 모두 느리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기죽지 않고, 앞에 놓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끝이 어디이든 상관 없다는 듯 가고 있었다.

Steve Reich의 강의를 그냥 멈춰버렸다.

보현과 나들이를 갔다. 우리는 오래오래 길을 걸었다.

5/6

귤꽃이 왔다. 

가지치기를 하던 중, 쌍살벌 한 마리를 보았다. 노랗고 검은 몸의 벌 한 마리가 귤나무 가지 사이에 엄지 손가락 만한 둥지를 짓고 있다. 벌은 벌집 근처를 떠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했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있든 없든 아랑 곳 하지 않고, 벌은 자기의 일에 몰두했다. 끊임없이 하지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천천히 벌집의 몸을 불리는 듯 했다. 꽤 가까이에서 가지를 치고 있었지만, 나를 공격하지 않아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119로 신고를 하라고 안내를 해주신다. 내일 전화를 해야겠다.

일본으로 EMS를 보낼 수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나무를 전정하는 것과 노래를 믹싱하는 것은 얼마나 비슷한가: 1) 어떤 나무(곡)는 손을 안 대도 충분히 멋지다. 2) 어떤 나무(곡)는 손을 댈수록 이상해진다. 3) 처음엔 난감해도 하다보면 어떻게든 마무리가 된다. 4) 디테일에 빠지면 발란스를 놓친다. 5) 끝나고 나면, 결과를 떠나 스스로가 대견해진다. 6) 그리고 곧 잊는다.

(IFS#3) 루프 그리고 반복에 대한 생각을 종일 하다.

5/7

바람은 거세고, 자잘한 일이 많은 하루다.

벌집을 없애러 119 구조대원 세 분이 오셨다. 여왕벌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엄지 만 한 벌집을 한 분이 똑 떼어낸다. 아직 집이 작아서, 새끼 벌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니 참 다행이라고, 말씀하신다. 쌍살벌은 계속 집을 지을 터이고, 또 벌집이 보이면 지금처럼 크기가 작을 때 신고를 하라고 하신다. 그래야 새끼 벌들이 덜 죽지 않겠냐는, 그 마음이 참 고맙다.

5/1일 만든 유기 칼슘에 패화석을 적게 넣었다는 걸 알았다. (대략) 1 킬로 그램을 더 넣었고 휘휘 저으니 거품이 아직 올라온다.

동력 분무기의 엔진 오일을 바꿨다. 챔버를 여니 짙은 올리브색 폐유가 쏟아진다. 맑은 새 윤활유로 갈고, 실린더에 그리스도 가득 채웠다. 꽃망울은 말 그대로 터질 듯하고, 나는 왜이리 설레는지 모르겠다.

두 군데 우체국에서 모두 거절을 당했다. EMS든 EMS 프리미엄이든, 지금은 교토로 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커다란 소포 상자를 들고 집으로 왔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우체국에 연락을 했다. 오사카를 통해서라면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 는 말씀이다. 1 달은 걸리겠지만요, 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IFS #3) 파도 같은 modulation. 하지만 Suzanne Ciani 처럼은 아니고.

5/8

아침부터 각종 지원 사업 서류를 만드느라 바쁘다. 세 가지 지원 사업이 정신 없이 얽히고 설켜있다. 게다가 6 년 동안 써온 유기질 비료의 유기 자재 공시가 보류되었다는 소식을 건네들었다. 도청 직원은 같은 이유로 골분도 쓸 수 없다는데 무슨 이유인 지를 물어봐도,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는 눈치다.

바삐 다른 비료를 찾았다. N-P-K 비율과 가격을 비교하고, 전화를 걸어서 견적을 받고, 지원금에 맞춰서 포대 수를 계산하고, 또 어떤 사업은 도 내 업체에서 생산되는 비료에만 적용된다는 말에 또 다른 업체를 알아보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

5/9

비가 오는 하루. 남편 제비가 둥지 아래 꺽쇠에서 꾸벅꾸벅 존다. 머지 않아 새끼새가 태어날 지도 모르겠다.

(IFS#3)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센서를 고쳐서 화분에 꽂아보았다. 신호가 온다. 이 미약한 신호를 control voltage로 바꾸어 소리를 모듈레이션 했다.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흙일까. 수분일까. 미생물일까. 유기물일까.

5/10

반 나절을 나무들과 보냈다.

나무들이 나를 달래주었다.

바람이 보리를 쓸어주듯,

장다리 꽃이 함께 흔들려주었다.

마음이 황량해져도, 황량한 노래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IFS #3) Formant filter + Clouds. Real-time recording & bounce.

5/11

이수지 님의 소포가 도착했다. 나를 위해 일부러 한 부를 더 만들었다는 작업 일지를, 우두커니 선 채로 다 읽어버렸다.

(...)

무엇이 나오기도 전에 형식의 정합성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 어쩔 수 없다. 내 안에서 아귀가 맞아야 시작할 수 있으니.

(...)

용기가 났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과수원 학교에서 놀라운 소식을 보았다. 몇 년 전 다른 나무에 깔려 죽었다 생각했던 배나무가 다시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낸 것이다. 옆에 있는 형제 나무가 끊임없이 뿌리로 돌봐준 덕분일 지도 모른다.

아내는 되살아날 소 蘇 자를 이야기 해주었다.

7년을 같이 지낸 장독대와, 굳은 시멘트 두 덩이와 끝내 이별을 했다.

문득 잊고 있던 화분에 흠뻑 물을 주었다.

나는, 배나무처럼, 귤나무처럼, 혹은 제비나 달팽이처럼 살면 되겠다, 생각을 하였다.

5/12

방제 #3-1. 기계유제 5L + 보르도칼 2 봉 in 1000L.

귤 꽃은 10% 정도 왔나.

기계 유유제를 샀다가 공시가 안 된 제품임을 알고 반품을 했다. 농협 직원은, '친환경'이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신다. 성분이 똑 같아도 공시가 안 되면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친환경 농정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또 이상하다.

비둘기가 다시 소나무로 돌아 왔다. 비둘기 한 마리가 옆집 옥상에서 물끄러미 소나무를 내려다 보더니 휘릭, 나무 속에 들어와 꼼짝 않고 앉아있다. 알을 품는 걸까. 비둘기는 암수가 번갈아 알을 품는다는데, 한 마리 밖에 보이지 않는다.

(IFS#3) LOOP의 멜로디에서 where is my friend? Where is my friend?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layering 할 때,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5/13

방제 #3-2. 기계유제 5L + 보르도칼 2 봉 in 1000L.

너무나 좋은 타이밍에 방제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기쁘다.

되살아날 소蘇, 는 '발효'를 말하는 건 아닐까. 풀'艸'아래 묻어놓은 물고기'魚'와 곡식'禾'을 떠올리니, 후나즈시와 가자미 식해가 생각났다.

미생물은 세상을 정리해서, 되돌려준다.

⟪물이 되는 꿈⟫이 집에 왔다. 조촐한 축하를 했다. 보현이 와인을 한 병 사주었다. 고마워.

5/14

비 예보가 사라진 날. 순이 많이 올라왔다. 레몬 꽃망울이 하나, 둘, 톡톡 터지고 있다.

비둘기는 다시는 알을 떠나 보내지 않겠다 각오라도 한 듯, 꼼짝 없이 한 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다. 먹지도 않는 것 같다. 바다를 보다, 산을 보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유난히 가늘고 예쁜 목선을 보니, 사 년 전, 우리집에 왔던 페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페이도 우리집 소나무에 앉아 쉬는 걸 좋아했었지.

아이와 산책을 하고, 오두막에 가서 기계를 부치고, 집에 돌아와서 이수지님의 강연을 들었다.

5/15

비가 온다. 비둘기는 여전히 꼼짝도 않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근처 곳곳에 먹을 것을 뿌려놓았지만 본 척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녁이 되자 아내는 기쁜 소식이 있다며, 아무래도 비둘기가 짝과 교대를 하기는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처음 들어본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한 마리가 옥상 위에서 내려와 서로 자리를 바꾸더라는 것이다. 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필드 레코딩한 소리들을 정리했다. 작년 7월 새벽 5시의 빗소리가 너무나 장쾌하게 담겼다.

(IFS #3) 손으로 모듈레이션을 해보았지만, 별로다. 맘에 들지 않아.

5/16

안개가 자욱한 아침, 비가 흩뿌린다. 

도착한 기계가 불량이라 돌려보내야겠다.

푸른 주차장에, 붉은 담팔수 잎이 떨어져있었다.

5/17

꽃은 60-70% 가량 왔다. 올해 처음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레몬꽃이 여왕님처럼 활짝 피어났다. 다섯 꽃잎도 있고, 일곱 꽃잎도 있다. 아름답구나. 아름답구나.

봄순이 많이 굳었는데, 그럭저럭 순을 지켜낸 것도 같다. 오두막에 다시 컴퓨터와 악기를 갖다 놓았다. 어쩌다보니 지금부터는 집과 오두막, 두 군데에 실험실을 꾸리게 되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상순이 오두막에 놀러 왔다. 서너 시간 동안 음악 얘기만 하다가 돌솥밥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5/18

조성진 씨의 새 음반을 듣다. 베르그의 곡에서 반복적인 음률의 어센딩과 디센딩을 들으니, 마치 로패스 필터로 무브먼트를 준 것처럼 들린다.

책을 여기저기 보내었다.


레몬꽃이 한가득 피어났다.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IFS#3) 템포를 73에서 65로 낮추었다. 그러니 마디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숨쉴 공간이 더 생긴 것 같다. 패치의 attack 값을 올렸다. 필터 무브먼트 없이 바운스를 하는데, 충분하다. 미디 노트를 에디팅 하려다가, 말았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간다.

5/19

90% 넘게 온 꽃들이 엇갈리듯 피고 진다.

가지를 치는 중에, 또 쌍살벌이 보였다. 저번과 비슷한 패턴이다. 어쩌면 같은 벌일 지도 몰라.

다시 119에서 네 분의 대원들이 오셨다.

미안하다.

앞 밭의 옥수수들이 무럭무럭 커간다.

비둘기와 제비가 나란히 알을 품는 봄. 앵두가 제법 익었다. 하나 먹어보니, 맛이 꽤 들었다.

다 쓴 약 통을 개조해서 DIY로 수중 청음기 hydrophone를 만들다. 캔 안 쪽에 컨택트 마이크로 폰을 붙이고, 구멍을 내서 선을 빼고, 밀납으로 구멍을 메웠다. 만들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5/20

소만. 병원에 다녀왔다.

(IFS#3) 20년 된 조믹 프리앰프에 Rhodes를 연결해서 루프를 녹음. <timbre> vs. <motion & movement>에 대한 생각과 고민.

5/21

보현과 바닷가로 산책을 갔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었고 아이는 간식을 먹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있는, 여기가 천국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엉터리 hydrophone에 테플론 테이프를 감아서 방수처리를 하였다. 곧 테스트를 해야지.

5/22

제비 주니어가 태어났다. 

하이드로폰 테스트 실패. 가벼워서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철물점에 들러 묵직한 자석 추를 사왔다. 다시 개조를.

그러나 오늘도 바다는 아름다웠다. 말할 수 없이.

5/23

잿빛 곰팡이 방제 #1-1. 아미노 액비 2L + 키토 목초액 5L + EM-B 5L in 1000 L.

꽃은 90% 이상 졌고, 방제 타이밍이 너무나 좋다. 날이 많이 더워져서 금세 고글 안에 습기가 찬다. 뿌연 안경과 고글 너머로 보일 듯 말 듯한 여린 새순에 듬뿍 듬뿍 영양제를 뿌려주었다. 아직은 오전 방제도 그럭저럭 할 수 있다.

이제 과수원에도 두견이 소리가 들린다. 뻐꾸기 한 마리가 높은 전봇대 위에서 새끼들에게 목소리를 전한다. 쌍안경을 들자 내와 시선이 마주친 새가, 곧 입을 다물고 만다.

5/24

잿빛 곰팡이 방제 #1-2. 아미노 액비 2L + 키토 목초액 5L + EM-B 5L in 1000 L.

날이 조금 흐려서 약을 치기는 더 좋다. 액비가 많이 남아서 허약한 나무들에게 듬뿍 듬뿍 뿌려주었다. 선물로 줄 약도 한 말통 '포장' 하고, 집에 뿌릴 것도 따로 담았다. 마음이 풍성하다.

꽃은 거의 다 지고, 콩알 만한 아기 귤이 주렁주렁 달렸다.

부모 제비들이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끊임없이 목소리를 들려준다. 현관에 제비의 가슴털이 한 올 한 올 떨어져있다. 아기들을 덮어주려는 건가.

뜻밖의 improvization으로 IFS#4 를 만들었다.

5/25

안개가 짙은 날.

왠지 연락이 잦은 하루다. 지영이네가 소식을 전했고, 동하와 통화를 했고, 상순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저녁에는 배대표님과 손님들을 만났다. 모든 소식이 반갑고 감사하다.

이제 밤에도 부모 제비가 둥지에 머물며 잠을 잔다.

(IFS#4) modular filter와 magneto로 곡을 손질했다. 그런데 손을 대면 댈 수록 이상해질 것만 같다.

5/26

실비가 내리는 아침. 그러다 예상 못한 소나기가 내렸고, 촘촘히 짜둔 하루 계획이 다 소용없게 되었다.

서울 부모님이 오시기 전 날. 마당의 솔잎을 쓸어내고, 현관 청소를 하고, 집 안팎을 (적당히) 치웠다. hydrophone을 고쳤다. 물 속 소리를 녹음하러 바다로 갔지만 물 때를 놓쳐버렸다. 돌아와서, 치자 나무에 액비를 엽면 시비 해주었다.

성택씨에게 세미나용 사진을 보내주었다. 폴더에서 사진을 하나하나 찾으며 기억을 더듬다 보니, 오두막을 만들 던 순간들이 아련하고 그립다.

5/27

보현이 혈뇨를 눠서 급히 병원으로 갔다. 염증이 있는 것 같아 약을 받아왔다. 무척 쓴 약이라는 데 어떻게 먹여야 하나.

서울에서 부모님이 오셨다. 동네 식당에서 물회를 먹고, 어머님은 앵두를 따셨고 아버님은 휴식을 취하셨다. 누긋하게 쉬다가 삼나무 숲을 함께 걷고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일렉 기타와 페달로 작업을 시작한다.

5/28

하나님께서 메리 올리버의 ⟪Dog Songs⟫ 가 계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문득 작년 이맘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난다.

며칠 전 꿈 속에서 난 뜬금 없이 메리 올리버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취리히 클로텐 공항의 검은 이정표가 멀리 보이고, 어서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타야하는데 생각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였더라. 어디로 가야 되더라. 시카고였나. 아니, 메사츄세츠였나. 표에는 분명히 목적지가 적혀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글자를 읽어보려하면 할수록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종착지의 이름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탑승권을 들고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공항을 헤메다 잠이 깼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지. 갈 수는 있는 건지. 덜 깬 잠기운으로 산책을 하는데, 채 번지지 않은 잔디 떼 사이에서 처음 만난 누가 웃으며 인사를 한다.

from instagram @institute.for.silence, 2019-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