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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31

12/1

과수원으로 가는 길에 무지개를 만났다. 너무도 크고 선명한 무지개였다. 보랏빛 띠 아래로 다시 푸른 빛 초록빛 띠가 아스라히 이어진, 내 생에 본 가장 웅장하고 장엄한 무지개였다. 차를 잠시 세우고 지평선을 아우르는 무지개를 보며 나와 아내는 무탈한 수확을 빌며 기도를 했다.

몹시 추운 날.

12월 일에 박스 수급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고 첫 작업 날을 12월 3일로 미뤘다. 다음 주 화요일에 효진씨가 온다고 연락을 주었다.

아침부터 전정가위와 귤 가위를 갈고 닦고 기름을 발랐다. 작업실을 정리하고 타카로 벤치를 수리했다. 컨테이너를 밖에 내어 놓고 차와 커피, 물 등 참 도구를 갖다두었다. 두둑두둑 우박이 내린다.

내복을 꺼내 입었다.

저녁에 윤아씨와 화정이 엽서를 가지고 왔다.

Leonardo에게서 메일이 왔다.

<6시 내고향>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고 성민이 연락을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정중하게 거절했다.

12/2

황두와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아내는 파주에 가고, 나는 보현을 데리고 과수원에 갔다. 차를 한 잔 내려마시고 귤을 몇 개 따먹었다. 추워진 며칠 사이 귤맛이 더 깊게 들었다. 비료업체 직원분과 약속이 어긋나 내일 만나기로 했다. 택배사에서 송장을 찾아서 돌아왔다. 엽서를 봉투에 넣었다. 여전히 흐린 날. 보현과 숲을 걸었다. 나무들의 숨소리를 듣고 오니 한결 상쾌해졌다.

12/3

첫 작업 w/ 브루스+화정+윤하+금영+찬준+영호네 식구+성민/규리 1/2+로사 1/2.

5 킬로 50 개, 10 킬로 18 개 포장완료. 44 컨테이너 + 약간

12/4

아침에 비가 오다.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개었다.

둘째 날 작업 w/ 화정+윤사+브루스+찬준+금영+원희/창현/유진+효진+선휴/윤하/도원 1/2+로사/혜린/공리/록담 놀러오다.

김선생님이 트럭을 몰고 와주셔서 10 킬로 박스 350 개를 무사히 공장에서 가지고 왔다. 어제 작업 분은 직접 택배사에 배달하고, 오늘 작업분은 택배사에서 와서 싣고 가다.

총 78 개. 대략 50 컨테이너 수확

12/5

비교적 온화한 날.

셋째 날 작업 w/독수리 오형제+효진+문경+신애+스텔라.

예쁜이 56개 들쑥이 66개 캑터스 15개 발송. 현재까지 누적 2.2 톤 출하.

대략 30 컨테이너 보관 중. 왕파치가 15 컨테이너 나오다. 재 선별할 것.

12/6

넷째 날 작업 w/ 독수리 오형제+은혜+신애+새봄+문경1/2+동원.

수확 완료.

한 박스가 운송 중 파손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대한 빨리 다시 보내드리겠다고 거듭 사과를 했다. 오배송된 건이 하나 있고, 주소 변경된 분이 한 분 계신다.

누적 3.2톤 출하. 창고엔 대략 26 컨테이너+왕파치 15 컨테이너.

총 수확 4.1 톤. 예상치와 거의 들어맞는다.

바다 노을이 너무도 아름다운 날. 회청색 바다 위에 검붉은 하늘 끝자락. 손톱달이 떴다.

12/7

마지막 날 작업 w/독수리 오형제+동원.

38 박스 출하. 남은 귤 대략 430 킬로 보관 중.

12/8

휴식

12/9

보현과 함께 마지막 귤 박스 배달을 나섰다.

다시 작업 모드로.

12/10

3 킬로 박스 25 개, 5 킬로 박스 10 개 사오다.

코러스 녹음 시작. 보컬 정리 끝.

12/11

동네 벼룩시장에서 책과 쌀을 팔았다. 수확 때 만난 반가운 얼굴들이 다 모였기에 꼭 뒷풀이를 한 기분이랄까. 재형이형 시디를 동원씨에게서 사왔다. 시디를 듣는데, 다른 사람 같다. 엄청 노래를 잘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냈다. 올해엔 조금 늦었구나.

12/12

선물 배송. 여수 외삼촌 일행이 오셨는데 택배사에서 갑자기 후두둑 비가 내리는 바람에 패닉이 되었다. 난리도 아닌 택배사 갓길에서 비를 피해 서둘러 송장을 붙이고 박스를 나르고 하다보니 혼이 쏙 빠진 기분이다.

12/13

몹시 추운 날. 중산간에는 가는 눈발이 날렸다.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치고 삼촌 숙모님을 만났다. 하나님과 지은님이 보내신 선물이 동시에 도착했다.

12/14

남은 선물을 챙겼다.

창문이 흔들거려서 보니 지진 문자가 왔다. 담벼락을 따라 걷는데 나도 모르게 휘청 쓰러질 뻔했다.

돈도 시간도 똑같은 양이 똑같은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천 원 한 장도 어떻게 벌었는가에 따라 무게가 전혀 다르다.

12/15

보현의 건강검진. 결과가 좋아서 선생님과 우리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한라동물병원 원장님께서 보현의 선물을 가지가지 챙겨서 보내주셨다. 조 선배님께 귤을 보내드렸다.

12/16

믹싱과 에디팅. M149로 기타 녹음을 해보았으나 예전에 녹음한 것이 더 좋아서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12/17

진눈깨비. 바람이 거세다.

믹싱 엔지니어 Leonardo에게 노래 4의 스템을 보냈다.

노래 8 에디팅 시작.

12/18

어둡고 춥고 흐리다. 비료 같은 눈 알갱이가 내린 날.

노래 8 에디팅.

누나가 예약해준 마사지를 받고 돌아왔다.

12/19

새벽에 눈송이가 날렸다.

끔찍한 음악도, 음악일까.

노래 14에 다른 기타로 녹음을 시도해봤지만, 모두 별로다.

보현의 생일 파티. 세상에 와줘서 고마워.

12/20

"현재는 합성된 과거와 투사된 미래 사이의 끈이다." David Rosenboom의 글이었던가.

유학시절, 내가 만났던 풍경이 왜 그리 낯설고 멀기만 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때 그 이국의 풍경은 내가 잠시 '빌려본' 것들이었다.

12/21

메모해둔데로 트랙 정리를 하다.

별이 울린다. 종처럼 울린다. deep playing. deep listening.

자유로운 즉흥연주란, 할 수 있는 걸 제 맘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정말 유치하고 유아적인 발상이다.(...) 즉흥연주의 자유로운 면모는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이의 행위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연주자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한다는 것. 물론 나 자신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Chris Corsano

<Spectres II - Resonances> 다 읽다.

12/22

동지.

류이치 사카모토가 자신의 곡 <Merry Christmas, Mr Laurence>의 음표 595 개를 NFT로 내다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그 결정을 철회해달라는 답글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브라이언 이노는 어느 인터뷰에서 왜 NFT에 관심을 두지 않는 지를 묻는 말에, 자신은 NFT가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가치를 만든다는 건 이 세상에 가치를 더한다는 뜻이지, 내 은행 잔고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가 토종팥으로 죽을 끓여주었다.

노래 14 보컬 edit.

12/23

나는 연주가 얼마나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과도 씨름해 왔다. 음악의 맥락에서 '완벽'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완벽이란 부정적으로 정의되는 경향이 있는 단어다. 우리는 '불완전'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적어도 귀로 들어보면) 안다. 그렇다면 완벽은 불완전함이 없는 상태일까? 완벽은 존재보다 부재로 확인되며, 나는 그 점이 불편하다. 확실히 부실해 보이는 불완전함이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음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불완전함도 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다가가면, 목표물 역시 움직인다. 우리가 찾는 것이 목전에 있는 듯 보일 때, 우리는 그간 내내 찾아왔던 눈앞의 목표 너머에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더 많이 알게될수록 (더 '완벽'해 질수록)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조너선 비스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

세상에 있는 어떤 반복도 차이 없는 반복은 존재하지 않아요. 반복이 생겨나는 순간, 반복되는 순간, 차이와 틈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차이가 말을 해요.

- 서영채 <왜 읽는가>

성완씨와 점심을 먹었다.

12/24

새벽일만 하고 쉬다. 읍내 새로 생긴 목욕탕에 다녀왔다.

보현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보현의 간식을 사고 커피를 마시고 돌아와 집에 있는 식재료로 음식을 해서 나눠먹고 우리는 서로에게 카드를 썼다.

노래 14. editing.

12/25

매섭게 바람이 불고 눈이 흩뿌렸다. 목욕탕에 정기권을 끊고 돌아왔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연말이다. 저녁에 보현을 데리고 심바네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필콜린스의 노래가 들려왔다. 아내에게 노래 14를 들려주었다. 아내는 후렴구를 줄이는 것을 제안했다.

귤피차를 끓여 마셨다. 너무도 행복한 맛이다. 자형에게 줄 양말 주머니를 아내가 만들었다.

12/26

눈이 몹시 내린 날.

황두가 밥을 남겼다. 무슨 일일까. 보현과 눈이 쌓인 길을 뛰고 또 뛰었다. 보현의 무릎이 조금 더 부었지만, 그래도 원없이 뛰었다. 보현이 이렇게 행복해하니, 됐다.

곯아떨어진 보현의 저녁 산책을 건너뛰고,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밤에 가스가 떨어진 것을 알고 급히 온수매트를 꺼냈다.

12/27

부스터샷 맞다.

12/28

글쓰기 <-> 노래 editing 셔틀.

어쿠스틱 기타의 스펙트럼이 아름답다.

작업실의 기온이 14도로 떨어졌다. 백신 후유증인지 몸살기운이 돌아 타이레놀을 먹었다. 글쓰기 <-> 노래 editing 셔틀을 타다.

삼촌과 숙모가 왔다 가셨다.

12/29

1 시간 더 일찍 일어나다. 노래 14의 outro에 변화를 주어본다.

C&EN에 미생물을 engineering해서 비료로 쓰겠다는 연구 기사가 났다. 달콤 쌉싸름한 기분은 뭘까.

글쓰기 <-> 노래 editing 셔틀.

12/30

동하와 길게 통화를 했다. '나는 나의 좋은 친구인가' 동하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질문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구나. 동하가 읽었다는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날들>을 주문했다.

12/31

밤새 작업하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또 작업을 하다.

아내가 겨울 열매를 모아 테이블 장식을 했다.

Science discovers. Art digests.

Art is process, not product.

- Brian Eno

브라이언 이노의 talk을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