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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8

 

2/1

상순이 마이크를 건네주러 집에 왔다. 차 한 잔을 하고 돌아갔다.

 

2/2

오두막 정리를 하고 악기와 장비를 내려두고 왔다. 정전압 기계를 주문하고, 스피커와 uad-2의 견적을 받았다. 곧 멕시코로 가신다는 수녀님께서 너무나 아름다운 카드를 보내주셨다.

남쪽으로 난 오두막의 큰 창문에 낯선 흔적이 보였다. 자세히 보아야만 알만큼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부딪힌 흔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잠시 얼굴을 맞대고 지나간 듯한, 그 주먹만한 흔적 위에 붙은 가는 솜털이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새가 부딪힌 걸까. 나는 얼른 아래로 내려가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2/3

장작 반 루베를 구해와서 불을 때고 작업을 하다. 옆 과수원의 나무는 거의 다 베어졌다. 키 큰 삼나무들도 어느 샌가 모두 베어져 멀리 산이 보일 지경이 되었다. 과수원에 들어서니 왠일인지 더 많아진 듯한 멧비둘기들이 나를 기다린 것만 같다.

손님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 같이 점심을 먹고, 다시 오두막에서 작업을 하다. 다시 눈이 온다. 저녁을 먹고 다시 오두막으로 향하다. 미친 듯이 눈이 내리는데 오르막길을 오르지 못하는 차들이 하나하나 미끄러진다. 나는 겨우 트럭을 돌려서 엉금엉금 기듯 집으로 돌아왔다. 

 

2/4

눈이 하루종일 내리고, 집에만 있다. 방 온도가 13도 까지 떨어졌다. 발에 담요를 덮고 책상 앞에 앉으니 그래도 견딜만 한 것이 신기하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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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인지. 눈사람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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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눈 예보. 집 밖을 나가기가 힘들다.

 

2/7

눈발을 뚫고 오두막에 갔다. 프로그램과 하드웨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을 듣지 않고, 겨우 데모만 만들어 보내고 돌아왔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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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이 엄청나게 와 있다. 한 시간 넘게 보현과 눈밭에서 놀았다. 실은 얼마나 놀았는지도 모르겠다.

새 하드웨어를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다시 깔고 작업을 하다. 밤 늦게 운섭 형님에게 전화가 왔다. 깜짝 놀라 통화를 하다보니 전화기 배터리가 다 되었다. 작업을 마치고 오두막을 나왔는데,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트럭 앞유리에 가득찬 서리를 긁어내다가 나는, 열쇠 꾸러미를 오두막 안에 두고 문을 잠갔다는 걸 알아챘다. 자정 가까운 시간. 이곳에는 택시도 없고, 주변에는 민가도 없다. 심지어 편의점도 10시면 문을 닫는다.

나는 걸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얼추 계산해보니 5 시간 쯤 걸으면 집에 도착할 듯 싶었다. 하늘만큼 검은 차도 한 가운데를 걸으며, 차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누가 이 야심한 시간, 시커먼 롱패딩을 입은 이 정체모를 사람을 태워주겠나. 백팩이라도 창고에 두고올 걸. 밤하늘도 어둡고, 불빛은 없는 시골길. 

결국 한시간 반 가까이 걷다, 기적적으로 택시 한 대를 만났다. 아, 이 택시는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온 걸거야. 열쇠가 없는 나는 담을 넘어 집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이 웃픈 얘기를 어찌 전해주나 잠시 고민하다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2/9

다른 사람에겐 봄바람 같고 나에게는 가을 서리 같을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에겐 가을 서리 같고, 나 자신에겐 겨울 눈보라 같아. 

운섭 형님이 대삼치 한 마리와 병어를 가져다 주셨다. 집앞에 쌓인 눈을 퍼서 삼치를 담아오셨단다. 

악기가 오고, 동하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고, 이루님이 빌려준 카메라가 도착했다. 눈보라에 밀린 우편물이 한꺼번에 몰려 온 것 같다.

 

2/10

과수원엔 오늘도 바람이 거세다. 난롯불을 피우고 악기 세팅을 하였다.

Nathan East의 음반을 듣다. 녹음이 참 좋구나 싶었는데, Antônio Moogie Canazio가 믹싱을 했구나. Joao Gilberto, Maria Bethania, Caetano Veloso 와 일했던 이 브라질 사람에게 Nathan은 왜 믹싱을 맡겼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2/11

작업을 하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과수원.

 

2/12

또 눈. 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에서 죽은 새 한마리를 데리고 왔다. 노란 부리에 연녹색 깃털의 새. 청딱따구리 같다.

 

2/13

부모님이 오셨다. 나와 아내는 천리향 아래 새를 묻어주고 돌아왔다. 

한때는, 집시 재즈계의 루키였지만 지금은 k-pop 작곡가가 된 Andreas Öberg의 곡. Andreas의 동영상을 보면서 기타 연습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묘하긴 한데, 팝 작곡가로서 그의 작품도, 나는 좋다.

 

2/14

데모 컨펌 받다.

 

2/15

부모님이 가셨다.

 

2/16

설날. 차례가 없는 두번 째 설이다. 거의 처음으로 설 답게, 아무도 챙길 필요없이 놀멍 쉬멍하였다.

 

2/17

늦게까지 작업을 하다.

 

2/18

70년 대 음반 메들리를 우연히 듣다. 연주도, 사운드 발란스도 좋다.

어쩌면 우린 예전 사람들을 너무 쉽게 과소평가하는 건 아닐까. 

 

2/19

작업물 컨펌받다. 4월 가족 여행 계획을 다시 짜고, 숙소와 비행기 예약을 마쳤다. 

 

2/20

작업물을 마지막으로 다듬어서 보냈다. 오두막에 쓸 작업용 전원을 주문했다. Klark Teknik의 EQ를 주문했다.

 

2/21

건강검진. 내시경 검사 도중 수면 마취가 풀려버렸다. 가끔하곤 하던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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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걷다.

경환이가 앨범을 보냈다. 녹음을 참 잘했구나. 

 

2/23

자동차 점검을 받으러 갔다. 고쳐야 할 곳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봉식이네가 주고간 레몬 가지에서 움이 텄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24

산길을 타고 카센터에 가서 차를 찾아왔다. 수십만원의 견적이 나왔지만 꼼꼼한 기사님 솜씨 덕에 14살이 넘은 차는 몰라보게 건강해졌다. 

아마존에서 책을 몇 권 주문했다.

 

2/25

목수들을 만나고 오다. 작년 제주 공연 때 보고 처음이다. 얼마만인지.

참으로 오랜만에 같이 점심을 먹고, 여행 중 찍은 영상을 같이 보고, 새로 지은 집 구경을 하고,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그 몇 달 사이 봉식이는 큰 수술을 했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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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바다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졌어. 

왜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2/26

올해 첫 농장일을 시작. 녹슨 톱날을 갈고, 전정가위 하나를 새로 샀다.

이제 거의 모든 나무가 잘려나간 옆 밭은 더이상 과수원이 아니고 곧 몇 채의 타운하우스가 더 들어올까.

우리 밭의 나무 하나가 이유없이 뽑혀, 토막토막 난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 귤맛은 왜 이렇게 별로냐며 인부 한 명이 무심하게 말을 건넨다. 사장님 나무를 왜 뽑았을까. 장비도 있는 데 한 그루 옮겨 심어드려야겠네. 

그 무력한 마음에 돌담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웃자란 나뭇가지를 잘라내면서, 나는 시선을 자꾸 돌렸지만, 이미 공사판이 된 과수원에서는 채 마르지도 않은 나무 시체 태우는 냄새가 날아들고, 그 새하얀 잿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초록빛 귤이파리 위에 내리앉은 모습을 보며, 나는, 마냥 따뜻한 무언가, 한없이 조용한 무언가, 그냥 무조건 부드러운 그 무언가만 끝없이 그리워하며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운섭형님이 주신 커다란 참돔은, 얕은 물가에서 지느러미를 커다랗게 한 바퀴 돌리곤, 멀리 날아가버렸어.

 

2/27

위통에 새벽 일직 잠이 깨다. 당분간 차도 커피도 마시지 못하겠다. 오전 일을 마치고, 레몬 농장 견학을 다녀왔다. 이 농장에선 전정을 하지 않는다. 열해를 입은 나무 정수리가 유난히 누렇던, 17년 된 레몬나무들. 이 섬에서 가장 오래된 레몬 나무들이라지. 도장지를 일부러 키워서 툭 늘어뜨리고, 그 끝에서 열매를 수확한단다. 도장지는 힘이 좋을테니, 그 힘이 좋은 가지에맺힌 열매를 수확한다는 것도 역발상이라면 역발상일까. 하얗게 돋은 꽃몽오리가 보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라임나무를 보았다. 귀현씨가 직접 잡은 커다란 홍해삼을 가져다 주었다.

 

2/28

호우경보가 발령된 날. 오전에 보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비를 맞으며 산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