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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24

11/1

새벽별이 맑다. 귤빛 별 하나가 하늘 정수리에 떠있었다.

공연 set list 고민이 시작된다.

고양이 한 마리가 창고 앞에 죽어있었다. 아내가 숲에 데려다 주고 왔다.

죽음의 슬픔은 잠시 밀려갔다 다시 큰 파도로 밀려온다. 슬픔의 시차는 어디서 생기는 걸까.

11/2

공연 그리고 음반으로 아주 조금 바빠졌다.

스위스에서 만났던 친구 Tyler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년 4 월 제주에 온단다.

공연 연습 시작.

11/3

Estevam 수업. 상순 만나서 점심 먹고 차 한 잔 같이 하고 돌아오다. 공연 연습.

11/4

날이 쌀쌀하다. 바닷가를 걷다 금세 돌아왔다. 보일러를 처음 켰다.

TNR 다시 시작.

아침 연습. 아침 목욕.

윤아씨, 화정과 회의.

룰라의 상파울루 연설을 보았다. Daniela Mercury가 함께 있는 것이 보인다. 좋아하는 모든 뮤지션들 거의 모두가 룰라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11/5

새벽부터 연습. 오늘도 쌀쌀하다.

<강>을 만든지 9 년이 된 이제서야 이 곡을 어느정도 칠 수 있게 되었다.

아내가 눈을 다쳐서 함께 시내에 다녀왔다.

아내가 병원으로 들어가고 보현과 병원 주변을 걸었다. 보현은 수술을 받은 병원 근처가 떠오르는지 자꾸만 병원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무조건 병원에서 멀어지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보현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그냥 놔두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정신없이 걷다 보니 보현에게도 나에게도 익숙한 골목이 나왔다. 보현이 그제서야 환하게 웃는다. 햇살처럼.

아내는 생각보다 진료가 일찍 끝났다. 우리는 환한 개울가를 한참 더 걸었다. 햇살이 내리쬔다.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모든게 감사하고 찬란한 하루.

밀화부리를 만났다. 종추.

11/6

새벽 연습. 춥다. 아침부터 샤워를 했다.

<알바트로스>를 잘 연주할 수 있을까. 긴 곡이 지루하진 않을까. 손톱 끝을 다듬는다. 기타는 나의 손톱에서 나를 만나서 함께 노래를 한다.

가상의 셋리스트를 짜고 러닝타임을 계산해보았다. 노래는 넘치고 시간은 모자라다.

밭에 가서 약줄 정리. 쌍살벌집에는 아직 벌들이 오골오골 모여있었다. 움직임은 많이 둔해졌다. 더이상 풀들은 힘이 없어 보인다. 마른 덩굴을 걷고 레몬나무 두 그루의 레몬을 따주었다. (레몬이 물러진 것이 이상하다). 전체적으로 수세는 괜찮다. 오두막 근처에 작은 귤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밟혔다. 직감적으로 위태로워보였다. 점적 관수를 해주고 돌아왔는데 예감이 좋지가 않다. 너무 가물었던 날씨 탓이다.

11/7

오전에 아내 병원에 같이 갔다가, 간 김에 시내에서 셋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연습.

공연 관련 문자를 스탭들과 계속 주고 받았다.

밭에 간 아내가 사마귀가 알을 낳는 모습을 보내주었다. 정주석 한 켠에 엄마 사마귀가 알을 낳으려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올 해 유난히 사마귀가 많이 보인다. 사마귀의 먹이감이 많다는 뜻이고 그만큼 과수원에 사는 온갖 곤충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보조금 관련해서 박스 업체에 전화를 드렸다.

10월 말이면 진작 끝났어야 할 농삿일이 아직도 '항그' 밀려있구나.

11/8

아침 7시. Estevam 수업. 음악 얘기, 노래 얘기만 한참 하다가 마지막 5분 쯤 남았을 때서야 겨우 'subjuntivo do presente' 얘기를 했다.

결혼기념일. 오전부터 오후 내내 셋이 함께 지냈고 우린 맛있는 것을 함께 만들어 나눠먹었다.

중산간 상점에 가서 공연 옷을 샀다.

월식. 달을 보며 기도했다. 용기있게 살고 싶다고.

11/9

올해 마지막 방제 #1: 칼슘액비 5L, EM-B 5L, amino 2L

나무 한 그루가 무척 수상해서 걱정이 된다. 관수 밸브를 열어 놓고 경찰서로 갔다. 아침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뺑소니 신고가 들어왔는데, 내 차가 어떤 분의 차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비탈길에서 차가 밀리면서 뒷차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방제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경찰서로 가서 '진술서'를 쓰고, 피해자 분과 통화를 하고, 보험 처리를 하고 돌아왔다.

회사에서 토끼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정말 '열심히' 그린 게 이렇다.

11/10

모처럼 단비.

Gal Costa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78세인 Gal는 작년까지도 앨범을 냈다.

<Hoje> 앨범이 나왔던 다음 해. 2006년 여름이었다. Gal Costa가 취리히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취리히로 갔던 기억이 난다. Kaufleuten이란 클럽이었는데, 사실 공연 자체만으로는 기억에 남은 게 거의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들은, 나를 제외한 대부분이 브라질 사람들이었다는 것. 공연 도중 누군가가 "Meu nome é Gal!"라 외치자, "Muito bom"하며 다음 노래를 부르던 Gal의 무뚝뚝한 표정. 같은 이름의 관객이 왔구나, 생각했던 나. (동명의 히트곡이 있다는 걸 뒤늦게서야 알았다.) 공연이 끝나고 로잔으로 돌아오던 그 어두웠던 고속도로. 유난히 '혼자'란 생각을 많이 했던 후텁한 밤공기.

농장에 가서 관주 밸브를 잠그고 약 조제를 미리 해두고 약해진 나무에 달린 귤을 모두 따주었다. 마른 가지도 보이는대로 잘라주었다.

"나무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쌍살벌들이 거짓말처럼 집을 떠났다. 올해 우리는 이 위험한 동거에 성공한 것이다.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하늘과 성당 건물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 보았다. 어떤 응답도 들을 수 없었다. 응답 없는 기도라해도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런 때가 있다. 라이트를 켜고 돌아오는 길. 길이 더 어두워졌다. 나는 조금이라도 평안해졌을까.

11/11

수컷 사마귀를 먹는 암컷 사마귀를 보았다.

올해 마지막 방제 #2: 칼슘액비 5L, EM-B 5L, amino 2L

뿌얘진 고글 너머로 붉게 열매가 익어가는 작은 낙원이 보였다.

11/12


카롤리나
깊은 당신 두 눈은
세상 모든 아픔을 담은 듯
너무 많은 아픔이 어려있네요


말했죠. 되지 않을 거라고
아무리 울어도 안될 거라고
차라리 나와 춤을 추자고
이제 우리 시간을 즐길 때라고
나는 말했지만


저 멀리 있는, 내 사랑
오늘 장미 한 송이가 태어났어요
세상 모두 삼바를 추고 있어요
그리고 별 하나가 떨어졌어요


웃는 모습을 얼마든 보여줄 수 있어요
그리고 창문 너머엔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지
하지만 카롤리나,
당신은 보려하지 않네요


카롤리나
슬픈 당신 눈에는
아직도 사랑이 가득하네요
이젠 남아있지도 않는 그 사랑이


말했죠. 끝날 거라고
그만 받아들이라 했던 말들
당신을 기쁘게 하려 불렀던 많은 노래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네요


저 멀리 있는, 내 사랑
오늘 장미가 시들어버렸어요
축제는 끝났고
배는 떠나버렸고


창문 너머로
시간은 흘러가버렸다는 걸
나는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데
하지만 카롤리나,
당신은 보려하지 않네요



- Chico Buarque <Carolina>



11/13

Eno는 예술에 있어서는 'genius'보다 'scenius (그가 만든 말이지만)'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단독자로서의 개인 genius이 아닌, 여러 동료들이 모여 이룩한 천재적인 '시대' scenius 가 세상을 움직여간다고.

11/14

먼저 수확한 귤을 부모님들께 보냈다.

회사에서 엘피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밤새 포장을 하느라 다들 고생할텐데 아무 도움도 못되는구나.

11/15

수확전까지 수리를 할 시간은 없지만 상태를 먼저 점검해보러 데크를 뜯어냈다. 확실히 상이 많이 썩었다. 결국 다 뜯어내야 하겠지만 수확기간 동안 어찌어찌 버텨보려고 일단 벽돌로 상 아래를 받혀두었다.

11/16

2X6 나무를 사와서 계단 판재를 갈았다. 두 군데가 문제인데, 하나는 나사선이 망가져 갈 수가 없다.

쌍살벌 한 마리가 데크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11/17

<목소리와 기타> 앨범이 나온 날.

아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내 장식을 해주었다.

Milton Nascimento의 80 세 공연. 관객들은 '고마워요 Bituca'라고 쓰인 종이를 높게 들었고 Milton은 무대 위에서 눈물을 흘렸다.

11/18

10 kg짜리 박스 200 개를 받아 창고에 부려두었다.

11/19

재주도 좋아 친구들에게 귤을 갖다주었다.

동률과 통화. 시간을 보니 3 시간 53 분이 지났다.

11/20-21

서울. 첫 공연 연습.

셋리스트 수술을 해야할 듯하다.

11/22

서울에 짐을 부쳤다. 열흘 간 묵을 터라 짐이 만만치 않다.

Estevam과 수업.

11/23

Erasmo Carlos가 세상을 떠났다.

서울 가기 전 날.

엘피를 들고 해가 넘어가는 바다를 보았다.

앨범에 새겨진 노란 알바트로스가 멀리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